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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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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완전한 낫질 계획의 채택 === 1940년 1월 이후, 상술했듯 반히틀러파에서도 일단 전쟁에서 이기고 봐야 된다는 여론이 지배적으로 변한다. 여기에 더해 1940년 1월 10일 [[루프트바페]] 소속 참모장교였던 헬무트 라인베르거 [[소령]]이 기존 황색 작전 계획서를 휴대한 채 벨기에에 불시착해 버리는 불상사가 터진다.[* 원래 목적지는 회의 참석을 위한 베를린이었으나 악천후로 비상 착륙을 했는데 하필이면 벨기에 영내였다.] 소령은 계획서를 파기하려 했지만 그 전에 [[벨기에군]]에게 체포되었고, 결과적으로 독일군의 프랑스 공격 전략은 연합군에게 고스란히 노출되고 만다.[* 드라마 [[더 크라운]]에서는 당시 선왕이던 [[에드워드 8세]]가 알려줬다고 말하지만 실제 역사에선 그런 일은 없었다. 독일은 당일 벨기에 언론 보도를 통해 알았고 라인베르버 소령의 불시착은 다음날인 11일 히틀러에게 전해졌다. ] 이렇게 기존 작전을 폐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자 참모총장 할더의 눈에 다시 띈 것이 바로 만슈타인의 작전 초안이었다.[* 역설적으로 이 사건은 독일군에게 악재만은 아니었는데 독일군의 기동계획을 입수한 연합군이 방어 태세에 들어가며 연합군 역시 독일군의 주공을 베네룩스 일대로 예상하고 있으며 프랑스 본토로 넘어오기 전 베네룩스에서 독일군을 저지하고자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할더 역시 신중한 용병을 선호하는 타입이라고는 하나, 일단 이 기책 자체는 일단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고려하고 있었다.[* 특히 할더와 같은 고급 참모장교는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대안이라 해도 일단은 검토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다.] 결국 당시에는 반려했지만, 불시착 사건으로 상황이 단단히 꼬여버리자 만슈타인의 작전안을 다시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게 된다. 여기에 만슈타인 개인의 인맥이 함께 작동하기 시작했다. 히틀러의 보좌관인 슈문트와 친했던 부하 [[헤닝 폰 트레슈코프|트레슈코프]] [[대령]]은 1940년 1월말 A집단군에 대한 순시 및 정보 수집 목적으로 방문한 슈문트에게 만슈타인의 작전안을 보여주었고 슈문트는 해당 계획안에 대한 설명을 듣자 '이것이 총통이 요구한 바로 그 작전이다'라며 기뻐하였고 이를 2월 13일 히틀러에게 보고했다.[* 훗날 트레슈코프는 검은 오케스트라단에 가입하여 히틀러를 암살하고자 시도하였고 트레슈코프와 검은 오케스트라단의 암살 기도로 슈문트 대장은 중상을 입고 합병증으로 사망했고 트레슈코프는 암살 시도가 실패한 것으로 드러나자 수류탄으로 자살했다.] 당연히 히틀러 역시 이 계획안에 뛸 뜻이 기뻐하며 주공을 스당 방면으로 정할 것을 결정하였다. 트레슈코프 대령으로부터 참모총장 할더가 만슈타인의 계획안을 불신한다는 불만을 전해들은 슈문트는 할더와 참모부의 주요 장교들의 눈을 피해 만슈타인과 히틀러가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음모를 꾸몄다. 슈문트는 국방군 총통경호대 소속이었다가 제7 기갑사단장으로 부임하게 된 에르빈 롬멜 소장을 비롯한 6명의 신임 장성급 지휘관과의 조찬식 날짜를 2월 17일로 결정하고 해당 자리에 1월 27일 제38 군단장으로 임명된 만슈타인을 초청하였다. 조찬식이 끝난 이후 히틀러는 알프레드 요들과 슈문트 대령만 동석한 채 자신의 집무실에서 만슈타인으로 부터 작전 계획안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을 보고받았다. 당시 히틀러는 엄청난 불안증에 시달리고 있어 휘하 장군들의 설명을 끝까지 듣지 않고 중간에 끼어들어 문제를 제기하거나 불안이 섞인 혼잣말을 하기 일쑤였는데 만슈타인의 계획안에 홀려 끝까지 경청했다고 한다. 특히 히틀러는 만슈타인의 강력한 전차 부대의 투입이라는 결론에 크게 감격하였고 동석한 요들에게 해당 작전안에 부합하는 전쟁 계획을 세울 것을 명령한다. 마침 할더 역시 만슈타인 계획을 진지하게 고찰하고 있었던 탓에, 결국 만슈타인의 작전은 프랑스 침공 계획으로 정식 채택되었다. 그러나 기획자인 만슈타인은 자리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작전 기획에 더 이상 참가하지 못했고, 작전의 세부 기획과 실행은 [[프란츠 할더]] 상급대장, 그리고 새로운 주공부대로 부상한 A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 상급대장, 그 휘하에 새로 창설될 작전술 제대로서의 기갑부대 지휘관이 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생겼다. 1. 주공을 맡을 A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 상급대장은 대표적인 신중파다.[* 이는 기갑군의 폭주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이때 과감한 참모장을 달아주면 적극성을 보강할 수 있겠지만, 일단 A집단군이 조공이라는 기존 계획에 따라 인사 이동을 하는 바람에 신임 참모장으로 임명된 조텐슈테른도 신중파로 정평이 난 인물이었다. 즉 집단군 전체가 위에서 내린 주공에 걸맞은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기를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1. 또 여전히 기갑부대의 작전술 제대 편성은 이론상으로 제대로 정립된 게 없고, 할더가 아무리 이 계획의 가치를 인지했다 해도 다른 지휘관들까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상태에서 웬 [[기갑]]이라는 병과가 전쟁을 혼자 다 치르도록 내버려 두기엔 타 작전술 제대 지휘관으로서의 자존심이 용서하지 않는다. 안 그래도 [[임무형지휘]]에 따라 자율사고 및 행동에 익숙해진 독일군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1. 게다가 작전술 기갑 부대의 작전적 가치는 아직 입증되지 않았으나, [[야전군]] 사령부 입장에서는 적어도 [[군단]]급 기갑부대는 야전군 작전 행동의 한 국면에서 강력한 전술 예비대로서 운용 가능한 세력임이 이미 입증된 바 있다. 원래대로라면 본인에게 주어졌을 강력한 기갑부대가 웬 듣보잡 작전술 제대를 만드느라 어디론가 끌려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게 된다면, 그 지휘관은 날개를 잘린 꼴이 된다. 안 그래도 병력이 부족한데 강력한 부대까지 뺏긴 지휘관들이 과연 어떻게 나올 것인가? 위와 같은 문제점들로 결국 할더는 만슈타인이 세운 최초의 계획에서 그다지 큰 진보를 이루지 못한 채, 오히려 부분적으로는 퇴보한 기획안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가장 큰 퇴보는 바로 기갑 부대의 작전술 제대, 즉 기갑군(Panzerarmee)을 창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 기갑군 개념은 [[바르바로사 작전]]까지도 현실화되지 못했고, 1941년 10월에야 처음으로 창건된다.] 일단 기갑 부대를 작전술 차원에서 운용하는 새로운 지휘부의 창설까지는 했으나 다른 야전군 사령관들의 눈치를 보느라 정식 [[야전군]]이 아닌 일종의 편법, 즉 다수의 군단을 예하에 가지고 있으나 야전군은 아닌 특수 목적 집단인 [[군집단|기갑집단]](Panzergruppe)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는 인선 문제로 기갑집단 사령관에 기갑 운용 경험이 거의 없는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기병대장을 앉힌다. 할더는 만슈타인의 작전을 채택하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실패 가능성이 높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클라이스트 대장의 제1기갑집단[* Panzergruppe 1, 일명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이 최초 주공에서 필요한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경우, 그냥 기갑집단을 해체하고 원래 계획대로 각 기갑군단을 야전군에 핵심 기동 예비대로 전환한다는 배수진을 친다. 요컨대 클라이스트에게 '사령관 타이틀을 계속 유지하고 싶으면 제대로 성공시켜라!'라는 강력한 엄포를 놓음과 동시에, 만슈타인의 작전이 실패할 경우에도 전통적인 프로이센식 기동전을 시도할 여지를 남겨두려 했던 것이다. 물론 이는 기동전의 저력을 알고 있는 현대인의 시점에서야 퇴보지, 당시 작전의 총 책임자로서는 도박수와 정론 사이에서 상식적인 수준의 절충안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문제로 현실적으로 작전의 가장 큰 위협인 주공 측면의 [[마지노 선]] 일대에서 프랑스군 역습에 대한 대책이 부실하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는 해결하기 위해선 적극적인 공세밖에는 답이 없었는데, 주력 기갑 부대는 전력으로 벨기에의 [[프랑스군]]을 포위섬멸해야 했으므로 이 방면으로 돌릴 충분한 기갑 부대가 없었다. 이 때문에 할더의 기갑 부대 종심기동은 소부대에 의한 특정 거점의 수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불안한 구조가 되었고, 결국 작전동안 있었던 몇몇 지휘관의 임기응변과 더불어 어느 용감한 부대의 맹활약을 통해 제한적인 수준으로 타개하는 데 그친다. 그러나 1940년 3월 이후, 이런 불안 요소에도 불구하고 만슈타인의 계획은 [[독일 국방군]]의 프랑스 침공 계획으로서 확실하게 다져졌고, 이런저런 작전상 마찰 때문에 많은 장애를 겪긴 했지만 결국 프랑스 침공에서 독일군이 승리를 거둔 결정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프랑스에서 제대로 대박을 친 나머지, 이후 독일의 국가 대전략 자체가 꼬여 버리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영국 대륙 원정군의 이탈을 허용하므로서 서유럽의 적을 남긴 한편 그 성과에 눈이 멀어 소비에트 연방을 침공하여 결국 양면전쟁이라는 국면으로 향하게 만들었으며, 이를 두고 [[PBS]]에서 방송된 다큐멘터리 Battlefield 시리즈의 The Battle of France에서는" [[아돌프 히틀러|그]]의 가장 눈부신 승리는, 그의 궁극적인 패배의 씨앗을 뿌렸다."[* "His most spectacular victory, thus sowed the seeds of his ultimate defeat."]고 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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